솥단지를 모시면 미신일까?

2010. 1. 26. 23:38 카테고리 없음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연구한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의 글이야. 비문학 정리하다가 나온 글인데, 한 번쯤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솥단지를 모시면 미신일까?





민속 종교에 대한 그릇된 고정 관념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몇 가지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종교와 그릇된 종교가 있다고 하는 생각, 귀한 종료와 천한 종교가 있다고 하는 생각. 그래서 영원한 종교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져 버리고 마는 종교가 있다고 하는 생각따위가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고정 관념이 그저 막연하게 생긴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늘 사물의 현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고, 그 의미를 재어 보는 것이 사람들의 어떤 근본적인 삶의 모습이고 보면, 종교에 대해서도 그러한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옳고 그름이라든가 귀하다든가 천하다든가 하는 생각을 종교를 마주하면서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생각이 올바른 가치 판단을 넘어서 하나의 굳어진 생각의 틀로 자리를 잡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겪는 현상이나 현실을 올바로 대하기보다는 그 만들어진 틀에 따라서 경험을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생각의 틀은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정리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현실 바로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크게, 그리고 함께 포용하는 그런 가능성을 망쳐 버리게 되는 수가 많다. 고정 관념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부정적인 현상 중의 하나이다.

옳은 종교가 있고, 그른 종교가 있다고 하는 종교에 대한 태도가 순수한 가치 판단에서 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고정 관념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것은 많은 논란이 있어야 할 아주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 자신이 종교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종교 현상의 일반'에 대한 가치 판단적인 접근보다는 우선 '자기가 자신을 바치는 종교'가 절대적이라는 전제 위에 서서 다른 종교를 상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판단의 과정 속에서는 자연히 자기 것은 옳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은 그르다는 고정 관념이 작용하게 된다.

민속 종교, 민간 신앙, 또는 토속 종교라고 불리는 종교 현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러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예사이다. 곧, 그러한 종교는 무엇보다도 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권의 한계를 벗어난 보편성, 정교하게 제도화된 체제 따위를 갖추고 있는 이른바 세계 종교, 또는 보편 종교에 대한 상대적인 호칭으로 상용되고 있다. 따라서 민속 종교 또는 민간 신앙은 특정한 문화 공동체에 한해서, 예를 들면 씨족이나 부족 하나의 민족이나 더 나아가 국가에 한해서 타당성을 지니는 신앙 체제를 일컫는 표현이 되고 있다.

민속 신앙을 이와 같이 보편적인 세계 종교와 상대되는 처지에 놓고 살펴보면 우리는 수많은 부정적인 측면을 늘어놓을 수가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특정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종교라든가,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나 있는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의 구실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물음은 아예 있을 수가 없다든가. 민속 종교는 온 영역 안의 인간들이 스스로의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 새롭게 터득해 가는 인간의 물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삶 전체의 정황이 빚어 내는 새롭게 제기된 인간의 물음에 대해서는 완전히 입을 닫고 만다고 하는 것들이다.

곧 민간 신앙은 삶과 늙음, 병듦과 아픔과 죽음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곧바로 끼어들기를 잘하지만, 그러한 원색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 가치나 의미의 차원으로 승화된 윤리의 차원에 이르면 전혀 무감각해져 버린다고 한다. 민속 종교가 이러한 현상으로 서술되는 한, 그것은 낡은 관습의 채 사라지지 않은 흔적, 윤리 의식이나 사회 의식이 모자라는 사람들의 독차지가 된 천한 종교, 현대의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이성의 논리를 지니지 못하고 시대 착오적인 환각 속에서 현실을 맹목적으로 극복하려는 미신이라고 단정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토속 신앙은 곧 미신이라고 하는 이러한 입장의 현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곳에서 종교 현상 일반과 관련시켜 가면서 민간 신앙의 중요성을 크게 떠올릴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그 까닭은 이른바 그러한 토속 신앙은 모든 종교의 기충을 이루고 있으며 그 토속 신앙의 자리가 대중이라고 하는 두 가지 사실에 있다. 이 기충성과 대중성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깊은 연결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선 우리는 이 둘을 따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속 종교는 세계 종교의 모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에 보편적인 세계 종교는 매우 후기에 나타나는 역사의 현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인간의 종교 의식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몇몇 세계 종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비로소 인간을 종교적이게 한 것도 아니고 불교가 비롯됨으로써 비로소 인도인들이 종교적인 가치의 현실성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러한 세계 종교들이 나서기 인전부터 인간은 '종교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실존의 정황이 궁극적으로 변화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존재 질서를 찾고 얽어 나가는 경험을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신화나 제의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 의식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보편 종교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보다 엄밀한 역사적인 처지에서 본다면, 보편적인 세계 종교는 그러한 근원적인 종교 경험을 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러한 근원적인 인간의 종교 경험은 문화적인 골에서 어쩔 수 없이 씨족이나 부족에게 한정된 것이었으며 그 지역이나 시대의 옷을 입고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 물음의 내용이나 방식, 해답의 내용이나 구조도 언제나 상황에 따르는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간 신앙, 또는 토속 신앙은 이러한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모습의 종교 경험이 전통문화 속에서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는 남은 그림자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민속 종교는 보편 종교의 모태이지. 결코 '다른 종류'의 종교는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민속 종교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 하는 역사적인 사실로도 실증이 된다. 인도의 경우에 베다 시대 이전의 종교는 완전히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민속 종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다 시대를 거쳐 초기 리그베다에 이르면 이미 많은 부족의 저마다 다른 신들은 하나의 신관념의 둘레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파니샤드에 이르면, 비록 여전히 아그니라든가 미트라라든가 마티리슈이라고 하는 다양한 신의 호팅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분'으로 굳어진다. 하나의, 또는 여럿의 토착 종교가 역시의 흐름을 따라서 천천히 스스로의 전통 속에서 보편성을 키워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야훼 신은 한 부족의 신이고, 모세는 그 부족의 종교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토속 종교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인간을 위해서 말을 할 수 있는 보편 종교로 자랐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민속 종교의 전통은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기독교가 가장 넓게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 있는 오늘날에도 기독교에서 이스라엘 토착 종교의 유산을 없애 버린다면 그것은 초라한 흔적마저도 남기기 어려울 지 모른다. 이른바 구원과 관계된 모든 상징은 근원적으로 이스라엘의 토속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 때문이다. 모든 민속 종교의 운명이 반드시 이러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토속 신앙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바깥에서 들여온 보편 종교에 자리를 빼앗기거나 그것에 의하여 보완되거나 했다. 그러나 자리바꿈이나 덧보탬이 그리 단순한 현상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보편 종교에 따른 토속 종교의 파멸일 수도 있고, 토속 종교에 따른 여러 보편 종교의 수용의 한 형태일 수도 있으며, 그들의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새로운 종합의 양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지 중요한 것은 토속 종교가 그 나름의 역사의 전승을 그대로 이어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상징의 선택과 해석의 원리가 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 민속 종교가 모든 세계 종교의 기층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인간의 문화나 역사에서 종교적인 관심이라고 하는 의식이 얼마나 근원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논의해야만 하는 인간관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곧 인간이 그가 스스로 자의식을 가지고 종교인임을 자처하기에 앞서서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득한 태고에서부터, 또는 실존의 뿌리에서부터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특정한 종교 제도 속에서 자기를 내어 놓은 결단을 이룩하기 훨씬 이전부터 종교적이었다는 사실과,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결단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한 인간의 타고난 상태를 보여 주는, 실증적인 예로 토속 신앙이 우리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민속 종교의 자리는 대중


여기에서 우리는 두 번째 문제, 곧 토속 신앙의 자리가 대중이라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종교적'인 것의 내용을 넓혀서 말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토속 신앙의 내용부터 살펴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첫째로. 토속 신앙의 특징은 그 내용이 세계의 어디에서나 공통적이고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 동해안의 별신굿이나, 루마니아 농촌의 봄의 축제나, 멜라네시아의 아오리제(풍어를 기원하는 제사) 따위가 갖는 신앙의 내용은 그 형태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기나 축원의 내용이나 그 현실성에서는 완전히 동질적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둘째로 거의 모든 토속 신앙은 주술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민속 종교를 받드는 사람들은, 주술적인 행위에 따라서 제어할수있고 소원을 아뢰어 통어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한 힘은 원시 종교 이론에서 주창되는 마나에 대한 신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또는 그 힘은 구체적인 인격의 모습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신에서 귀신, 천신, 혼백, 도깨비들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존재들에 대한 믿음이 그 나름의 우주의 질서를 이루고, 그 존재들의 힘에 대하여 조화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나 보람이 자라를 굳혀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신화와 제의의 의식 구조를 삶 속에 옮겨 놓게 된다.

그런데 셋째로, 이 주술적인 행위의 목적은 현세에서의 행복과 즐거움, 성공과 명예, 건강 따위를 위한 것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온갖 재앙과 화를 면하고 그만큼의 온갖 복을 누리려는 동기가 모든 민속 종교에는 가장 깊이 스며 흐르고 있다. 영혼의 구제라든가, 해탈이라든가, 죄의 고백이라든가 하는 문제 의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비윤리적이라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윤리의 감각은 다른 긴박한 동기로 말미암아 언제나 움츠러들어 있고, 만약 그러한 의식이 선명해지는 때라 하더라도 그것은 복을 받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특성의 뒷면에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천지 개벽을 주장하는 강한 경향성이다. 이를 우리는 넷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현세 중심의 사고와는 엇갈리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말론적인 의식은 비록 그것이 새로운 창조에의 기대라 할지라도 현실 부정적인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진 새로운 개벽이후의 세계가 지금의 좌절이나 실패가 충족되고 역전되는 정황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천지 개벽 사상을 중심으로 한 민속종교 또는 토속 신앙의 내용은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려는 현세주의가 극단적으로 비꼬인 형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잇대어 다섯째로 그들의 초월자에 대한 경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신 또는 힘의 존재와의 직접성이다. 토속 신앙에서 초월 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질 수 있고, 내가 ‘그곳’에 갈 수 있고, 그가 ‘이곳’에 올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른바 ‘절대 차자’로서의 신은 경험되지도 않고, 경험된다 하더라도 아무 뜻이 없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 초월자의 구실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 왼쪽 눈의 눈병을 고쳐 주든가, 어떤 중학교에 입학이 되도록 해주든가, 오늘 오후에 비가 오게 하든가, 내일은 고깃배를 타지 말라고 일러 주어야 한다.

끝으로 지적할 수 있는 토속 신앙의 특징은, 이른바 지도자와의 관계이다. 토속 신앙의 본디 구조에서 볼 때에 이 관계는 하나의 관습일 수도 있고, 다만 하나의 전승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민간 신앙은 교의나 교리가 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체계화되어 있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면 그때에는 그 공동체를 구성한 개인, 곧 지도자의 개인 경험이 경전이 되고 신학이 되고 교의가 된다. 제의적인 형태의 공동체 구성이 아닌 민속 신앙에 근거한 공동체의 구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신흥 종교라고 하는 현상 속에서 민속 신앙이 조직화되는 면모를 엿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토속 신앙이 보편 종교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도 다름 아닌 강한 영도력에 기대는 공동체의 구성인데, 이때에 그 영도력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리고 그 지도자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노예에 가까울 만큼 기대게 된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초월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의 특징과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제나 지도자는 민속 신앙 안에서 신의 대행자 곧 힘의 소요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속 신앙의 특징을 이와 같이 간추려 놓고 보면 그 민속 신앙의 자리가 대중이라고 하는 사실은 곧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 쉬운 개념이 아니다.

더욱이 그 대중이라는 용어를 민중이라는 용어와 동일하게 사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민중이라는 용어는 정치학·사회학에서 계층 구조를 설명하는 용어이거나, 기독교 신학에서 ‘지금 이곳에서 가장 사랑이 필요한 무리’라고 설명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민속 종교의 자리가 대중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대중이라든가 민중이란 용어를 앞에서 풀이한 민속 신앙의 특징과 연결시켜 그와 같은 내용의 종교를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범위를 정하여 그 풀이가 마땅하냐 하지 않느냐를 따져 보면 되겠다.

첫째로, 대중은 합리적인 사고를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잠재 의식적인 동기와 느낌을 좇아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 안에 있는 개인은 그의 개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고전적인 개념을 끌어낸다면 대중은 원시적이다. 따라서 대중의 종교도 원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는 신화적인 사유 구조 안에서 온갖 사물이 단일한 체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둘째로, 대중은 언제나 젖먹이적인 사고에 젖어 있다.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분석적인 판단이 아니라 환성적인 꿈이다. 그래서 대주은 쉽게 전설을 만들고 많은 기적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보증을 강요한다. 따라서 그들은 상징적인 사고를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셋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대중의 일방성이다. 그들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다른 의견을 내어 놓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완전히 거절해 버리든지 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진지만을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또다른 가능성에 대한 회의라든가, 확실성에 대한 추구가 없기 때문이다.

넷째로 이와 함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야 할 것은 대중은 윤리적으로 선할 수도 있고 또 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은 반드시 선한 경향설을 지니고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외부의 영향이나 외부의 지도에 따라 그 경향성이 쉽게 바뀌어질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필요는 선한 경향이든지 악한 경향이든지 어느쪽으로 이끌든지 언제나 대중속에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끝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끌리고자 하는 것이 대중의 특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 이끄는 힘은 구체적이고 절대적이고 그 권위가 독보적이기를 요청한다. 뿐만 아니라, 이때에 이루어지는 몸바침은 종국적인 종교의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그 권리에 대한 것이다.

막상 이렇게 대중의 특성을 간추려 놓고 보면 그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종교 경험의 현상은 민속 종교의 특성으로 지적된 몇 가지의 항목과 일치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왜냐 하면, 민속 신앙의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는 주술성과 현세성은 대중이 지니고 있는 비상징적인 사고나 일방적이고 거의 중성적인 윤리 감각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바탕은 민중의 근원적인 종교 의식


문제를 이렇게 살펴보면, 우리는 이른바 민속 종교라든가 토속 신앙을 보편적인 세계종교와의 상대 개념으로 불러 오면서 일종의 고정 관념에 기대어 거절해 왔다는 이 글의 전제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다른 의견을 제기할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생긴다. 한 가지는 어떻게 서술되었든 대중의 특성과 민속 신앙의 특성이라고 지적된 내용들은 인간의 타고난 종교적인 동기와 그 동기가 실현되는 현실 속에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한 가지는 보편적인 세계 종교 속에도, 오늘날 대중이 그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한, 그 대중이 지니고 있는 신앙이란 그 보편 종교가 사용하는 ‘신학적인’내용이나 형식과 상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신앙이리라는 판단이다.

그런데 가장 문제의 알맹이가 되는 것은 현대의 보편 종교 또는 세계 종교라는 기존의 위대한 종교가 토속 신앙이 갖는 이와 같은 종교적인 기층성과 사회적인 대중성을 무시하고 오히려 편견에 치우친 정죄(定罪)를 하며 토속 신앙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토속 신앙 속에 있는 민중 의식이란 가장 근원적인 종교 의식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지는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에 대한 적나라한 절규의 표상이다. 병에 걸리면 낫고 싶은 것이 그 신앙 속에 있는 민중 의식이고 죽어 가는 자식을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자기를 다 바쳐 애원하는 기도가 그들의 신앙 속에 있는 이른바 민중의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민중 의식은 병이 나으면 춤을 추고, 낫지 않으면 신을 원망하고 땅을 치지만 그러다가 곧 잊어버리고 새 기쁨에 감격하고 그렇게 시간과 역사를, 자기의 세월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좌절과 그들의 희망이 그대로 그들을 ‘종교적’이 되게 해 준 것이지 엄청나게 고상한 어떤 윤리의 규범이 ‘종교’를 태어나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종교를 지니지 않을 수 없는 소박한 민중 의식이라면 기존의 종교는 그 의식을 소중하게 수용하면서 그 민중이 오늘을 사는 윤리적인 실존이 되기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는 기존의 위대한 종교들이 그 종교 내부에 있는 대중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민속 종교 또는 토속 종교가 있는 자리는 언제나 대중이다. 그리고 기존의 종교가 대중를 포함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는 민속 종교 또는 토속 신앙이 여전히 기층적인 것으로 자리잡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른바 보편적인 종교는 두 가지 다른 모습으로 이 사실을 자기 안에 수용하고 있다. 하나는 그 대중의 자리에서 그들의 종교적 욕구를 그대로 주술적으로 충족시키고 축복하면서 스스로를 살찌우는 조직화된 종교 제도의 관료적인 귀족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소박한 종교적인 욕구를 정죄하면서 사회적인 이념의 형성을 위해서 그 민중 의식을 동원하는 차디찬 모습이다. 앞의 정황에서의 대중은 기만당하는 현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비대해지고 뒤의 경우에는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생리를 키우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민중 의식이 어떠한 신앙의 자리에서 종교적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있는 토속 신앙과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의 민중 의식은 무엇인가를 겸허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나의 의식의 심층에 있는 종교 의식도 현세적이고 주술적이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중적인 민속 신앙의 모태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그것을 존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에게 정직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토속 신앙과 그 속에서 한데 엉킨 민중 의식을 비로소 공통된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해는 새로운 보편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죽어 가는 자기 자식을 붙들고 이 자식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에게 죽고 사는 것은 신의 뜻이니 죽든지 살든지 신을 찬양하자는 설교가 종교적인 것일까? 아니면 먼저 함께 살려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자식의 죽음은 구조악에서 오는 것이니 여기에서 그런 절망의 울음으로 죽어 가는 자식을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절규의 대열을 정돈하여 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이 또다른 슬픔을, 죽음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이 종교적일까? 그러기에 앞서서 먼저 살려 달라고 함께 기도를 해야하 지 않을까? 그러나 나서 그 기층적인 ‘종교적’정서가 그대로 성숙한 ‘종교’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입장에 서든지 토속 신앙 속의, 민중이 지닌 종교 의식이 이용당하거나 빼앗기거나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은 종교는 주술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인 감각이 없이 그대로 현실에서의 이익 추구만을 만족 시키면 되고, 그러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대중의 성격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일 수는 없다.

종교의 역사는 종교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종교는 국가의 흥망 성쇠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출현과 소멸의 역사를 거쳐 왔다. 민속 종교는 그 문화의 한계를 뚫고 보편 종교로 성장하기도 했고 다른 보편 종교를 고집스럽게 자기 모습 속에 용해시키기도 했다. 여러 가지의 문화 변동 이론들은 저마다 이러한 현상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자체가 인간의 변화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끝내는 인간 자체의 본성과 그 불변하는 본질을 짐작케 해주듯이 종교의 역사도 그 들쑥날쑥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종교적이었음과 종교적임을 변하지 않는 사실로 증언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삶과 죽음, 아픔과 늙음에 대한 관심을 결코 그 소박한 차원에서 지나쳐 버릴 수만은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토속 신앙은 그 가장 원색적인 모습이며, 거기에서 발견되는 민중 의식이라는 것은 따라서 정치 사회적인 계층 의속도 아니로 종교적인 선민 의식도 아니다. 그대로 인간, 그것도 한데 모여 웅성거리며 사는 인간의 자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종교적인 몸짓을 통해 드러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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